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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마20:17-34)

by James Cha

2023년 3월 13일(월) / 매일성경 / 마태복음 20장 17-34절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7-28)
 

[하나님 - 본문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1. 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때까지도 제자들은 여전히 지상에 영광의 왕국을 건설하실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의 청탁이었습니다. 

그 청탁의 내용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예수님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야고보와 요한의 집안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잘 살았고, 그들의 어머니는 혈육적으로 예수님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같은 사회적 우월성과 혈연적인 관계 때문에 자기들에게 제일 높은 지위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이 가시면류관이고, 주님이 받으신 영광이 십자가의 영광임을 이들이 알았다면 과연 제가 그 면류관과 십자가를 받겠다고 고백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이 땅에서 누릴 권세의 면류관과 눈부신 영광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남은 열 제자들이 듣고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모으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세상이 말하는 높음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아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기대에 예수님을 끼워맞추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높음은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의 기준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부리고, 거느리며, 복종시킬 수 있는가가 높음의 기준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이 섬기고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낮아짐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지금까지도 마땅히 섬김을 받아야 할 분께서, 종처럼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오르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진정한 섬김의 본을 보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32-34)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길목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맹인 두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의도적으로 그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아마도 온 힘을 다해 여러번 예수님의 귓가에 들리도록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맹인들을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도 그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이 두 맹인은 더 큰 소리로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들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인간 - 본문속에서 나타난 인간]
1. 권력에 생겨난 욕심과 시기(21-27)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지핀 권력(자리)에 대한 욕심은 제자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서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예수님의 곁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었던 마음이 바로 제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속마음이 드러나자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십니다.

당신과 함께 고난의 자리까지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2.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른 두 맹인(29-34)

두 맹인은 예수님을 정말 뵙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을 "랍비여!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맹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봅시다. "주여!" 나의 주인, 구원자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많은 이들은 병고침에 대한 기적만을 누렸지 예수님을 따랐다는 고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맹인들은 곧 보게 되자, 그들은 곧장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나 - 나의 삶의 적용]

예수님은 자신이 걸어갈 고난과 죽음의 길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 세상의 보좌에 오를 영광의 길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봐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가 마실 수 있느냐?"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이 질문 앞에 순전한 믿음으로 "네 주님!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걷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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